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덕궁 인정전 (문단 편집)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은대계회도2.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인정전.png|width=100%]]}}} || || {{{#gold '''16세기 조선 전기 창덕궁 인정전 일곽의 모습이 담긴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 || {{{#gold '''19세기 〈동궐도〉에서 묘사해놓은 인정전 권역'''}}} || 1405년([[태종(조선)|태종]] 5년) 창덕궁을 창건할 때 지었다. 건립 당시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고, [[정문]]인 [[창덕궁 인정문|인정문]]도 중층이었으며 행각 모서리에 십자각(十字閣)이 있는 등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1418년([[세종(조선)|세종]] 즉위년)에 고쳐지으면서 정면 칸을 5칸으로 늘렸다. 1505년([[연산군]] 11년)부터 인정전과 [[창덕궁 선정전|선정전]]에 [[청기와]]를 올리려 했으나[*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1월 6일 정해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인정전(仁政殿)과 선정전(宣政殿)은 모두 청기와로 이어야 한다. 사찰도 청기와를 이은 것이 많은데, 하물며 왕의 정전(正殿)이랴. 그러나 청기와를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우니 금년부터 해마다 구워 만들어 정전만은 으레 청기와로 이도록 하라." 했다. 인양전(仁陽殿, 내연을 베풀던 전각)과 대비가 옮겨 지낼 곳을 새로 지을 때도 청기와를 올리려 했다.], 1506년(연산군 12년)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당하면서 [[공사]]는 중지되었다. 조선 전기 내내 저 모습을 유지했으나,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불탔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중건했다.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 초기까지 약 270년 간 재건하지 못한 [[경복궁 근정전]]을 대신해 '''조선 후기 내내 사실상 정궁 정전(법궁 법전)으로 [[궁궐]]을 상징했다.''' 일례로 [[민요]] 《농부가》를 보면 '인정전 달 밝은 밤 세종대왕 놀음이요'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세종대왕]]은 [[임금]]의 대명사로, 인정전은 궁궐을 대표하는 건물로 언급한 것이다. [[이괄의 난]], [[병자호란]]의 화마도 비껴갔으나 1803년([[순조]] 3년)에 화재로 불탔고 다음 해 다시 지은 뒤 1857년(철종 8년)에 다시 보수했다. 1907년([[융희]] 원년)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일제강점기]]인 1926년까지 살면서 인정전 건물이 많이 바뀌었다. 1994년에 원래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